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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만세운동 중심지 목포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

개신교와 근대문화 어깨 걸고 들어온 길목

작성일 : 2023.04.13 09:36

목포에 양동(陽洞)이 있다. 서양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양리’ ‘양동으로 불렸다. 양동의 상징이 양동교회다. 선교사 유진벨이 1897년에 세웠다.

반도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목포는 뭍과 섬을 오가며 선교 활동을 하기에 좋았다.

때 맞춰 목포항도 열렸다. 교회는 양동의 언덕에 천막을 치고 시작됐다. 목포는 물론 전남 개신교의 시작이었다.

자연스레 개신교 선교의 근거지가 됐다. 양동교회는 1900년에 한식 기와로 지어졌다.

신도들이 계속 늘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윤식명 목사가 초빙 됐다. 호남의 첫 조선인 담임 목사다.

미국인 선교사가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한국인이 세운 자립 교회가 됐다. 4·8만세운동 중심지 목포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

개신교 근거지 양동교회 문화재

 

교회 한쪽에 선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라고 씌어 있다.

지금의 교회는 191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신자들이 직접 유달산의 돌을 옮겼다고 전한다.

직사각의 예배실을 만들고, 가운데 휘장을 경계로 남녀 신도실을 나눴다. 왼쪽 출입문 위에 태극문양과 함께 大韓隆熙4(대한융희4)’이라고 새겨져 있다.

융희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 4년은 순종이 통치하던 마지막 해를 가리킨다. 1910년이다. 오른편 문에는 옛 한글로 쥬강생일천구백십년이라고 씌어 있다.

주 강생은 예수가 태어난 해를 일컫는다. 서기 1910년이다. 정면 출입문에는 돌조각에 십자가를 새겼다. 신도들은 이 출입문을 통해 예배당에 드나들었다.

왼쪽 문은 남성, 오른쪽 문은 여성들이 이용했다. 교회 건물은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양동교회는 근대문화가 들어오는 통로였다.

선교사들은 지역의 의료와 교육에도 신경을 썼다. 선교사 오웬이 의료활동을, 스트레퍼는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지역주민과의 거리감을 없애는 방편이었다. 스트레퍼는 1903년 여학생 10명을 모아 수업을 시작했다.

목포여학교. 1911년엔 정명여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석조건물을 지었다. 정명여학교는 호남의 첫 여성교육 기관이다. 4·8만세운동 중심지 목포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

4·8독립만세 재현하며 그날 되새겨

 

정명여학교는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양동교회와 함께 목포 만세운동의 가온누리가 됐다. 학생들은 교장 김아각(다니엘 커밍) 선교사로부터 독립선언서, 결의문 등을 전달받아 시위를 준비했다.

191948일 학생과 교인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양동교회의 종소리가 신호탄이었다. 만세 함성과 태극기 물결이 목포시내 전역으로 퍼졌다.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정명여학교 학생과 양동교회 신도들이 많이 구속됐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갇혔는지,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임시휴교를 했다. 1920년부터 22년까지 정명여학교가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한 이유다. 목포4·8 만세운동은 또 다른 항일운동으로 확산됐다. 양동교회 신도들은 70년대 민주화 투쟁에도 앞장섰다.

5 18민주화운동 때엔 기청목포청년연합회 깃발 아래에 모였다. 그 일로 고통받은 이들을 돕는 일도 거들었다. 양동교회는 지금 기장과 예장으로 나뉘어 있다. 기존 양동교회는 기독교장로회, 예수교장로회는 양동제일교회가 됐다. 일제강점기 만세운동 소식을 담은 지하신문과 독립선언서, 결의문 등이 발견됐다.

1983년 정명여학교 선교사 사택의 천장을 보수하는 과정에서다. 학교에 독립기념비가 세워졌다. 선교사 사택은 1912년 목포에 지어진 첫 번째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지금은 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정명여중 고교에서는 해마다 4·8독립만세 운동을 재현하며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고 있다.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를 잇는 도로가 만세로’, 골목은 만세길로 이름 붙여져 있다. 4·8만세운동 중심지 목포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

이난영 나고, 박승희 열사 배움터

 

민주화를 부르짖은 박승희도 정명여고를 다녔다. 박승희는 YMCA고교생 모임 활동을 하며, 전교조 교사 해직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전남대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91429일 학내에서 노태우정권 타도’ ‘미국 축출을 외치며 분신을 했다.

정명여고 후문 앞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목포를 대표하는 가수 이난영의 태 자리도 양동이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로 큰 인기를 누렸다. 박향림 장세정 이화자와 함께 걸그룹도 결성했다.

저고리 시스터즈는 한국 최초의 걸그룹이다. 이난영은 자신의 딸과 조카 딸로 김시스터즈를 만들어 미국에도 진출시켰다. 1959년의 일이다. 미국에 진출한 우리나라의 첫 걸그룹이다. K-팝의 씨앗이 됐다. 이난영은 삼학도에 수목장으로 모셔져 있다. 유달산에는 목포의 눈물노래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