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점호 (사)전남예총 회장
작성일 : 2024.11.05 16:28

새벽안개가 걷히면서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리자 우리 일행은 가거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해상으로 네 시간 이상 가야 하는 먼 길이다. 선체에 몸을 맡긴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안부를 묻는 현지인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정겹게 들려온다.
배는 파도를 헤치며 한나절을 열심히 달렸다. 뱃전에 아마도 퍼어런 멍이 들었을 터이다. 이윽고 대한민국 최서남단 가거도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먼 바다 위 외딴 섬, 신라인 장보고는 ‘사람이 가히(可)살 수 있다(居)’고 해서 가거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민박집 주인들이 몰려나와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며 왁자지껄하다. 이제 관광지로 자리매김하여 외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숙박업이나 식당업이 이 섬의 주요 산업이 된 모양이다. 예약해 둔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잠시 머언 바다를 바라본다. 그저 점 하나 보이지 않은 망망대해다.
먼저 이장님을 찾아뵈었다. 반가이 맞아주면서도 웬일이냐고 묻는다. 동네청년회가 주최해서 ‘ 찾아가는 음악회’를 준비해온 것인데 모르시는가 싶어 난감하기 짝이 없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장님은 술이 거나해지자 자기를 무시했다면서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가 세심하지 못했던 탓이다. 섬에선 이장님의 통솔에 의해 모든 일이 진행되는데 그걸 간과한 것은 무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해가 늦게 진다는 이곳 가거도에도 일몰이 찾아왔다. 출렁대는 파도 위로 찬란한 빛길을 내며 불타던 석양이 가라앉자 곧 칠흑 같은 어둠이 깃들었다. 선창가에 정박해둔 배들이 불을 환히 밝히고 작업 중이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갈매기 떼가 선창가를 모조리 접수해 버렸다. 불빛에 비쳐 날아오르는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매우 구슬프다. 순간 아득한 옛날, 망망대해를 헤치며 고기를 잡다가 날이 저물어 이곳에서 하룻밤 정박하는 뱃사람들을 상대하던 객주집이 떠올랐다. 이곳에도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천희 같은 여인들이 있었을 터이다. 그 네들이 겪었던 애환과 그리움이 갈매이 울음에 섞여 스며드는가 싶더니 가슴에 짜릿한 통증이 일었다. 끼륵~ 끼륵~ 끼륵~ 나를 보내주세요! 저 좀 데려가 주세요, 울어댔을 그 시절은 이미 오래된 추억이다. 그 추억의 밤과 갈매기가 연신 합창을 한다. 불협화음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은 멋진 관광지로 탈바꿈했으니 언제든 떠나고자 하면 떠나고 돌아오고자 하면 올 수 있는 곳이고 뱃사람 아닌 이들이 더 많이 드나드는 곳이다.
무대를 정리하고 음악회가 시작되었다. <흑산도 아가씨> 구성진 연주가 흘러나오자 삼삼오오 모여든 주민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합창을 한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주민대표로 꽃무늬 블라우스 차림의 할머니가 뽑혀 나왔다. 할머니는 십팔번이라며 <섬마을 선생님>을 열창했다. 섬마을에 부임한 총각 선생님은 섬처녀들의 가슴을 사뭇 설레게만 해 놓고 떠나버렸으니 어찌 야속하지 않겠나. 그때 그 처녀인 듯 노파의 노래는 애절하다. 길게 늘여 빼는 가락이 영락없이 철새처럼 왔다가 떠난 임을 아직도 그리워하는 듯하다. 그 미운 사내가 오늘 밤의 주인공이던가. 열아홉 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총각 선생님,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노랫가락의 여운이 자박자박 따라왔다. 섬색시라는 인물의 캐릭터는 아리따운 외모가 아니라 여리면서도 올곧은 순정에 방점이 찍힌다. 파도 소리에 잠을 청하면 불쑥 생각했다. 꿈속에서라도 총각 선생님이 한 번 되어볼까.
총각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간밤의 소망이 피곤했던 것일까? 푹 자고 깨어보니 해가 중천이다. 아뿔싸! 만약 섬처녀가 왔다가 해도, 곯아떨어진 몰골을 보고 그냥 돌아갔겠다. 일행들과 아침 식사 자리에 앉았다. 이 지역 특산물인 돌미역, 거북손, 홍합으로 차려진 밥상은 어떤 산해진미보다 일품이다. 섬 전체에 갯바위가 널려 있어 낚시꾼들도 많이 몰려든다는데 상에 올린 생선도 섬사람들이 직접 채취하거나 잡아 온 자연산인 것 같다. 밥상머리에서 연신 탄성이 터졌지만, 오전 배를 타야 하므로 서둘러 일어섰다.
쾌속선이 도착했다. 청년회에서 나와 여러 가지 선물 보따리를 건네며 배웅을 해줬다. 일정이 짧아 아쉽지만 충만한 시간이었다. 일행은 이구동성 입을 모은다. 너무 좋았습니다. 의미가 큽니다. 이런 행사를 자주 열어야겠습니다. 그때 누군가 낮은 음조로 <사공의 뱃노래>를 흥얼거렸다. 간밤의 흥취가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순박하고 꾸밈없는 섬사람들과 한바탕 어울린 지난 밤의 청취는 내게도 특별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가히(可)살 수 있다(居)는 가거도(可居島)가 아니라 아름다울 가를 붙여 가거도(嘉居島)라 해도 좋겠다. 그 아름다운 섬이 가물가물 멀어져 간다.
금주의 핫 뉴스